I. 서론
1953년 법이 제정된 이래 66년 동안 유지되어 온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1].1) 이 사건의 청구인은 산부인과 의사로 2013년 11월부터 2015년 7월까지 총 69 회 임부의 부탁으로 낙태한 공소사실 등으로 기소 되어 재판을 받던 중 형법 제269조 제1항 및 제 270조 제1항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주장하며 위헌 법률심판을 제청하였으나 기각되었다. 이에 2017년 2월 위 조항의 위헌 확인을 구하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다.
형법 제269조는 여성의 자기낙태죄를, 제270조는 의사 등의 업무상동의낙태죄를 규정하고 있다. 현재의 형법은 모자보건법 등 특별법으로 정한 경우를 제외하고 낙태를 처벌하고 있어서, 그동안 낙태죄 존속 여부를 둘러싸고 첨예한 사회적 논란이 이어져 왔다. 생명옹호냐, 선택옹호냐 식의 이 분법적 대립구도에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란 태아의 생명권에 비해 당연히 하위의 것으로 취급되 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난 2019년 4월 11일 헌재는 “낙태를 전면 금지하고 형사 처벌하도록 한 형 법 규정은 임신부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해 위헌”이라고 결정하였다. 다만 낙태죄가 곧바로 폐지되면 사회적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2020년 12월 31일까지 법조항을 개정하라는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2) 헌재의 이러한 판정은 7년 만에 그 결론이 완전히 뒤집힌 결과 로, 2012년 8월 낙태죄 처벌 조항의 위헌 여부 심리에서 이미 한차례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당시 “태아에게도 생명권이 인정되어야 한다”며 “낙 태를 허용하지 않는 게 임신부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2].3)
생명권은 선험적이고 자연법적인 권리로서, 인간으로 형성 중에 있는 생명인 태아에게도 생명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판시한 2012년 당시 헌재는 태아가 비록 그 생명의 유지를 모(母)에게 의지하지만, 그 자체로 모와 별개의 생명체이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태아의 성장 상태, 즉 임신의 경과나 생물학적 분화 단계가 보호 여부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형법상 낙태 죄가 위헌이 아님을 인정하면서, 태아의 생명권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보다 우선해서 보장되어야 할 권리로 보았다. 이때 태아의 생명권과 임부의 자기결정권 간의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여성은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3]. 그동안 낙태(죄)를 둘러싼 기존의 선행연구들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충돌하는 상황으로 이해하고, 한편으로는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침해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임신한 여성과 태아는 완전히 독립된 존재로서, 대립하는 기본권 주체로 설정되고 이때 태아의 생명권 보호를 위해 여성의 낙태 처벌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의 틀을 전개해 나간다. 다른 한편 태아와 여성을 단순히 대립하는 존재가 아닌 서로 의존하되 독립적인 별개의 생명체로서 각자의 기본권 실현을 최적화할 수 있는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혹은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대립 구도를 극복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로서 ‘재생산권’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의 논쟁에서는 태아의 생명권 주체성 여부를 진지하게 제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본 연구는 2019년 헌재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2012년보다 진일보한 지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아와 여성을 대립시키는 구도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낙태 담론을 여전히 ‘허용’과 ‘금지’의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써 여성의 구체적인 삶의 맥락 속에서 겪는 낙태 경험에 대한 다양한 층위의 물음들을 충분히 끌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태아와 여성의 역동적인 관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하여 태아의 보호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판단을 전제로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먼저 2012년 낙태죄 합헌 결정과 비교되는, 2019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이를 통해 두 판결의 관점 차이가 드러나면서 일정 부분 헌법불합치 결정의 진일보한 지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헌법불합치의 입장이 “잠재적 인간”인 태아의 보호가 완 전한 의미로서의 인간인 여성의 보호와 모순을 일으킬 가능성 역시 확인하게 될 것이다.4) 특히 태아의 ‘생명’과 ‘생명권’의 구별을 혼동함으로써, 생명의 서열화와 더불어 ‘예외적 살인이 허용된 생명 권’이라는 모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5)
반면에 낙태를 태아의 ‘생명권’이 아닌, 태아의 ‘생명’이 임부의 신체에 기반한 관계에 주목하게 되면, 임신한 여성은 태아를 자신과 이해를 달리하는 대척점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직업, 경력 그리고 파트너와의 관계, 나아가 태어날 아이가 처 할 환경이나 조건 등 다양한 요소와 가치들을 종합하여 임신중단 혹은 출산 여부를 고려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6) 기존의 기본권 대립구도로는 보호나 양육, 그리고 책임 등이 결부된 여성과 태아의 특별한 관계성이 충분히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여성과 태아의 상호의존적 관계성에 기초한 권리로의 재설정을 위해 임신중단에 대한 논의가 개인의 선택을 넘어 ‘건강과 재생산에 대한 권리’로까지 고려될 수 있는 도덕적 준거로서 ‘비지배 자유’의 원칙을 제안할 것이다[4]. 이는 임신 중단에 대한 개인적 권리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권리의 보장으로까지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줄 수 있다. 나아가 건강과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공평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논의와 실천들을 위한 초석이 될 것이다.
Ⅱ.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의 비판적 검토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명시적 이유로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해온 현행법에서 여성의 몸이나 그 몸에 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태아의 존재와 대립되어 ‘생명권’에 비해 항상 부차적인 문제로 인식됐다. 더욱이 여성에게 낙태에 관한 결정은 단지 임신유지냐 중단이냐를 선택하는 문제로 한정되어 왔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한 여성에게 낙태란 임신에서부터 출산과 육아 그리고 양육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삶에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태 행위 그 자체만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그 행위를 한 여성과 의료인을 처벌하는 현행법은 여성들에게 지속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낙태를 오롯이 여성의 책임으로 환원하여 낙태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인식시킴으로써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낙태의 담론을 위축시켜 온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2019년 4월 헌재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통해 낙태에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매우 통합적인 관점에서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의 낙태를 둘러싼 의사결정에 미치는 다양한 요소들과 조건들을 숙고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여성의 자기결정권 담론을 확장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좀 더 구 체적으로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의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태아와 여성은 상호의존적 관계이다. 그동안의 낙태죄와 관련된 논쟁들은 대체로 ‘여성의 자기결정권 대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대립적인 구도에서 문제를 파악하고자 했다. 그런데 임신한 여성과 태아는 단순히 대립적으로만 볼 수 없는 특별한 관계이다. 태아는 엄연히 모와는 별개의 생명체이지만 모의 신체와 밀접하게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생명 유지와 성장을 전적으로 모에게 의존하고 있다. 임신한 여성과 태아는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의존적인 매우 독특한 관계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성은 낙태 갈등 상황에서조차 종종 발견된다. 일정한 경우 임신한 여성들은 자신이 처한 사회경제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임신과 출산 및 육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만약 자녀를 출산하게 되면 어머니가 될 자신뿐만 아니라 태어날 자녀마저도 불행해질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면, 낙태를 결심하고 실행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가해자 대 피해자라는 단순한 관계로 임신한 여성과 태아의 관계를 고정시켜서는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한 바람직한 해법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현재 국가는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한 사회적, 제도적 개선 등의 적극적 노력 대신에 임신한 여성을 처벌하면서 낙태를 전면적·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물론 국가는 태 아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일한 생명이라고 할지라도 생명의 발달과정을 일정한 단계로 구분하고, 그 각 단계에 상이한 법적 효과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국가가 생명을 보호하는 입법적 조치를 함에 있어 인간 생명의 발달단계에 따라 그 보호 정도나 보호 수단을 달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현재 의료계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임신 22주를 기준으로 태아의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하다고 판단한다.7) 태아가 모체를 떠나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와 비교할 때 훨 씬 인간에 근접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임신 22주 전이면서 임 신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는 시기까지의 낙태에 대해서는 국가가 생명 보호의 정도나 수단을 달리 정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3].8)
둘째, 임신은 여성의 삶 전체를 규정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여성이 임신하게 되면 약 10개월의 기간 동안 급격한 신체적·심리적 변화를 경험하며, 출산 과정에 수반되는 극도의 고통과 경우에 따라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위험마저 감내해야 한다. 출산 이후에도 우울증을 겪게 되어 극단의 선택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무엇보다도 여성에게 있어서 자녀의 양육은 얼추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끊임없는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노력이 요구되며 여성이 처한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마저 강제당하기도 한다. 소득이 충분하지 않거나 불안정에 따른 경제적 부담과 학업이나 직장생활 등의 사회활동에서의 문제들이 초래되기도 한다[5]. 여전히 가부장적 문화가 남아 있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불이익을 겪기도 한다. 부부가 모두 소득 활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느 일방이 양육을 위하여 휴직하기 어려운 경우나 상대 남성과 교제를 지속할 생각이 없거나 결혼 계획이 없는 경우, 그리고 상대 남성이 출산을 반대하고 낙태를 종용하면서 명시적으로 육아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경우, 혼인이 사실상 파탄에 이른 상태에서 배우자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경우, 아이를 임신한 후 상대 남성과 헤어진 경우, 결혼하지 않은 미성년자가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경우 등이 이에 해당된다.
자기결정권은 헌법 제10조 상의 행복추구권에서 파생된 권리로서, 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며 인간이 자신의 생활영역에서 인격의 발현과 삶의 방식에 관한 근본적인 결정을 자율적으로 내릴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 낙태죄 조항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태아의 발달단계와 상관없이 전체 임신 기간 동안 모든 낙태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형벌을 부과 함으로써 여성에게 임신유지와 출산을 무조건 강 제하여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명확하게 제한하고 있다.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공익에 대해서만 절 대적인 우위를 부여함으로써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2019년 헌재는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낙태에 대한 결정권이 포함된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임신과 출산의 과정에 내재하는 특별한 희생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로서 그동안 아주 협소하게 임부의 자기결정권으로 이해했던 것 과는 달리 임신유지나 중단의 결정은 한 여성의 현재와 미래의 삶을 재설계할 것을 요청하는, 중차대한 결정임을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낙태의 문제를 형벌로 규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낙태갈등 상황에서 형사처벌의 위협이나 도덕적 비난이 임신한 여성의 임신중단 여부 결정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사실과 실제로 처벌되는 경우마저 매우 드문 현실은 자기낙태 죄가 태아의 생명 보호에 그다지 실효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6].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결정에 의하면 자기 낙태죄 조항이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정당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효과적이고 적절한 방법으로 판단되었다. 만약 형사처벌을 하지 않을 시 낙태가 더 만연하게 될 것이며, 피임과 성교육의 보편화 및 임부에 대한 지원 등은 임신을 미리 방지할 수는 있겠으나 불법적인 낙태를 방지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보았다[1].
이와 같은 형벌의 위협으로 인해 낙태에 관한 적절한 정보를 받지 못한 채, 대부분의 여성이 안 전하지 않은 방법으로 낙태 수술을 받게 되는 측면이 있었다. 모자보건법이 정한 지극히 예외적인 사유를 제외하고 낙태를 한결같이 처벌함으로써 낙태에 관한 적절한 상담도 어렵고 정보 역시 충분히 제공받을 수가 없게 되어 음성적인 낙태 수술이 성행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수술 과정에서 의료 사고나 후유증 등이 발생하더라도 법적 구제를 받을 길이 거의 없는 것도 현실이다.10) 불 법적 낙태수술을 감행하는 여성들은 훨씬 비싼 수술비를 감당해야 하는데, 미성년자나 저소득층 여 성들의 경우 적당한 시기를 놓쳐 낙태하지 못하고 출산 후에 영아 유기나 살해로 이어지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7].11)
또한, 자기낙태죄 조항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본래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상대 남성들의 보복이나 괴롭힘의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낙태 이후 상대 여성이 더 이상 자신과 만나지 않으려고 할 때 자기낙태죄로 고소하겠다고 위협하는 경우나 이혼소송 과정에서 위자료나 재산분할 청구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낙태 사실 고소의 경우 등 이 그러하다[8].12) 이처럼 악의적인 고발이나 고소에 따라 여성과 의사 등을 처벌하는 것이 과연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한 조치라고 할 수 있을까?
원치 않은 임신은 언제나 있었다. 피임 도구 사용의 거부나 준비되지 않은 성관계, 강간과 같은 이유 이외에 적절한 피임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예도 늘 존재한다. 이때 낙태에 대한 형사처벌이나 원치 않은 출산의 강제보다는 오히려 피임법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성교육을 병행해 효과적인 피임법을 교육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피임은 단 순히 임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임신과 출산의 시기에 대한 자기주도적인 결정을 포함해 본인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계획한다는 데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3].
그동안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사이의 양자택일의 방식에서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사실상 박탈당해 왔다고 한다면, 이번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서는 어느 한 권리에 대한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양 기본권의 실현이 최적화될 수 있도록 실제적 조화와 균형을 꾀하려는 해법으로 인간 생명의 발달단계에 따라 그 보호 정도나 수단을 달리할 수 있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즉 생명의 연속적 발달과정에 대해서 동 일한 법적 효과를 부여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 문제의 극복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법이 과연 정당한 방식일까? 과연 이전의 합헌 결정과 비교해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실현하는 데 있어 ‘실질적’으로 진일보한 결정일지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검토해보고자 한다.
III. 여성의 재생산권 회복을 위한 ‘비지배 자유’ 원칙
2012년 헌법채판소의 합헌 결정(2010헌바402)에서 자기낙태죄 조항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행복추구권 보장을 천명하는 헌법 제10조로부터 임부의 자기운명결정권이라는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으로 보았다. “자기운명결정권에는 임신과 출산에 관한 결정, 즉 임신과 출산의 과정에 내재 하는 특별한 희생을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가 포함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권 침해 에도 불구하고 자기낙태죄 조항이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상이한 두 주체의 기본권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에서, ‘공적으로 보호받 아야 할 태아’와 ‘사적으로 자유를 누려야 할 여성’ 이라는 대비 속에서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2]. 이때 태아를 완전히 독립된, 즉 임신한 여성과는 별개의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2017헌바127)에서는 그동안 국가의 생명 보호 의무의 관점에 치우쳐, 태아의 생명권을 중심으로 판단함으로써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과도하게 침해되었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즉 태아의 생명 이 전적으로 의존적이고 태아와 그녀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지 않으며, 특히 임신과 출산 및 육아는 그동안 아주 협소하게 임부의 자기결정권으로 이해했던 것과는 달리 여성의 삶에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이라는 점을 인정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사익과 비교해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공익에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함으로써 두 기본권 간의 적절한 균형 관계의 달성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태아와 여성은 단순히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각각의 별개의 생명체이지만 동시에 밀접하게 결합하여 특별한 유대관계와 의존관계에 있는 상호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의 이해관계는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런데 헌법불합치 의견에서도 자기낙태죄를 ‘기본권 충돌’로 파악하는 기존의 판례들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낙태의 상황은 여성과 태아 두 주체 간의 문제이고, 임부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 충돌이라는 대립 구도 자체에 대해서도 여전히 변화가 없다. 특히 태아의 생명권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히고 있다.
“모든 인간은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가 되며, 형성 중의 생명인 태아에게도 생명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태아가 비록 그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모에게 의존해야 하지만, 그 자체로 모와 별개의 생명체이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아도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가 되며 국가는 헌법 10조 제2문에 따라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1]”
그런데 여기서 적시된 ”형성 중의 생명“ 혹은 ”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에서의 태아는 아직 인간이 아니라고 이해된다. 더욱이 ”특별한 사정“이라도 있다면 인간으로 성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태아는 인간은 아니지만 생명권의 주체”라는 주장이 된다. 생명권은 인간이 지닌 기본권 중의 기본인데 태아는 인간이 아닌 존재이지만 인간의 기본권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바로 여기에 헌법불합치 의견은 곧바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태아는 생명권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태아의 발전 단계에 따라 “보호 정도나 보호 수단을 달리”함으로써 다른 한편에서는 태아의 생명권을 박탈할 여지를 밝히고 있다. 헌법불합치 의견이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생명권 박탈을 허용할 수 있다고 본 근거는 다음에서 찾을 수 있다.
“국가에게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의 연속적 발전 과정에 대하여 생명이라는 공통요소만을 이유로 하여 언제나 동일 한 법적 효과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생명이라 할지라도 법질서가 생명의 발전 과정을 일 정한 단계들로 구분하고 그 각 단계에 상이한 법적 효과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예컨대 형법은 태아를 통상 낙태죄의 객체로 취급하지만, 진통 시로부터 태아는 사람으로 취급되어 살인죄의 객체로 됨으로써 생명의 단계에 따라 생명 침해행위에 대한 처벌의 정도가 달라진다[1].”
위의 내용에 따르면 형법은 진통 시점부터 태아를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그 이전의 태아는 아직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는 진통 시작 이전의 태아는 생명권의 주체가 아니지만, 그 이후의 태아는 생명권의 주체가 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반해 헌법불합치 의견은 태아가 생명권의 주체라고 전제한 상태에서 우리와 태아는 인간 생명의 서로 다른 발단 과정에 속하기 때문에 그 보호 정도나 수단을 달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인간과 동일한 생명권 주체이기는 하지만 태아에 대해서는 동일한 법적 효과를 부여할 필요가 없으므로 일정 단계 전까지는 그 생명을 빼앗는 일이 허용 가능하다고까지 주장 하고 있다. 헌법불합치의 이러한 주장은 단순위헌의 의견과 비교해보면 그 문제점이 분명히 드러나 게 된다.
“태아는 모체에서 점점 성장하여 인간의 모습에 가까워진 후 출생을 통하여 인간이 되므로, 인간이라는 생명의 연속적인 발달 과정의 일부이다. 태아가 생명체라는 점과 별개로, 태아가 과연 기본권 주체로서의 ‘인간’에 해당하는지에 관하여는 세계적으로 많은 논의가 있고, 태아가 생명권이라는 기본권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본 재판기관의 판단이나 위원회의 의견들도 있으나, 이러한 경우 에도 태아의 생명이 소중하고 보호할 가치가 있음은 부정되지 않는다.[1]”
여기에서는 태아가 법적 인간인지, 생명권의 주 체인지에 관한 명확한 판단은 유보된다. 그렇지만 생명과 생명권의 구별을 명시적으로 밝힘으로써 태아가 생명권의 주체라는 입장에 대해서는 결과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물론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무제한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임신 중단의 권리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국가의 이 익을 위해서는 규제될 수도 있다.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원리로 간주되기 때문에 국가는 임 신중단에 대한 권리를 제한할 수도 있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때 임신중단의 권리는 임신한 여성의 건강 보호와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이유로 규제될 수 있다. 이로부터 임신 22주까지 임신중단을 허용할 수 있는 “결정가능기간”이 제기된다. 물론 헌법불합치의 모순된 판단 역시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균형 있게 고려한 실제적 해법으로 임신 22주까지 임신중단을 허용할 수 있는 “결정가능기간”을 내리고 있기는 하다.13)
태아는 대략 22주 내외를 기준으로, 특히 모체 밖에서 생존 가능한 경우에는 훨씬 인간에 근접한 상태에 도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임신 주수가 증가할수록 낙태 수술로 사망할 위험이 높아진다고 본다. 임신 기간이 경과할수록 낙태 수술 방법은 더 복잡해지고 수술 과정에서 합병증이나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 역시 증가한다. 이에 대해 태아의 생명 보호뿐만 아니라 임신한 여성의 생명과 건강 보호라는 공익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9].14)
요약하자면, 헌법불합치 의견은 크게 세 단계로 구성된다. 먼저,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포함된다. 그리고 태아는 생명권의 주체이다. 마지막으로 국가는 임신 22주기까지 임신중단을 허용함으로써, 여성과 태아의 권리가 조화롭게 실현될 수 있는 실제적 해법을 모색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태아의 생명권과 태아의 생명 간의 차이를 간과함으로써 태아가 인간은 아니지만 생명권의 주체가 된다는 입장이다. 즉 태아는 아직 우리와 같은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에 근접한 상태’이기 때문에 헌법상의 생명권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태아가 생명권의 주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 22주 전까지는 그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입장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가령 헌법불합치 의견에서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하는 근거는 ‘모든 인간은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이므로, 태아에게도 생명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로 정리되지만, 태아가 인간인지 아닌지를 설득하는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그런데 생명권은 살아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체가 ‘법적 인간’으로 인정받음으로써 갖게 되는 것이다. 생명이 가치를 갖는 것과 그 생명이 지닌 주체가 생명권을 가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태아를 독립적인 생명체로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혹은 태아의 발전 단계 중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태아 생명의 가치를 다르게 평가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논의되는 핵심적인 주제는 태아의 생명이 아니라, 태아의 생명권의 문제이다. 더 심각한 것은 헌법불합치 의견대로 태아가 생명권의 주체라고 인정한다면, 시점과 상관없이 태아의 생명을 훼손 또는 박탈하는 행위는 살인행위에 해당될 것이다. 인간의 이익이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생명권을 제한하는 일은 가능할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 생명권 주체에 대한 살해행위의 허용은 생명권 성립을 애당초 불가능하게 만든다[10]. 결론적으로 헌법불합치의 의견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이해를 매우 불분명하면서도 모순되게 드 러내고 있는 셈이다.15)
의료 영역에서 강조되어 온 기존의 자율성 존중의 원칙은 개인의 결정이나 선택 그 자체의 문제로 과도하게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자율성 개념은 외부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자신에 관한 일을 숙고하고 결정하는 개인의 능력이며, 이러한 능력을 겸비한 주체가 자신의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율성 개념은 ‘지금’, ‘여기’라는 그 개인이 처한 상황적 특수성이나 그를 둘러싼 상호의존성은 제대로 고려되기 어렵고, 더욱이 다양하고 복합적인 의료적 의사결정 과정의 특성을 반영할 수 있는 논의의 틀로 기능 하는데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더 중요하게는 의사결정에서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한 개인의 요청을 오히려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명분에 따라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11]. 결국엔 모든 상황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물음으로 환원시켜버린다. 종래의 자율성 관점에서 보자면 임부의 자기결정권이란 임신과 출산 및 양육이라는 일련의 과정은 도외시한 채, 단지 임신의 유지 또는 중단이라는 선택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양자택일의 선택 구도로는 낙태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다각적인 구조들과 여성들 이 실제로 겪는 낙태 경험의 다양한 현실들에 대한 충분한 분석과 논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태아의 생명 보호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은 서로 대립과 충돌의 관계라기보다는 보완과 의존의 관계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임신한 여성의 안위가 곧 태아의 안위이며,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해서는 임신한 여성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태아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것은 임신한 여성의 신체적·사회적 보호를 포함해야 하며, 여성의 자기결정권 실현을 위한 사회적·심리적 지원의 방향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실질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이제 낙태의 문제는 여성의 몸을 둘러싼 자율적 결정의 권리이자 일련의 과정에서 사회적, 국가적 책임까지 포괄하는 사회적 권리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이로써 낙태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서 필수적이면서 기본적인 자기결정권으로 인정해야 한다. 나아가 임신과 출산을 비롯한 재생산에 대한 자기통제를 통해 여성이 자신의 삶과 건강에 주도권을 가지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어야 한다[12].16)
이번 헌재 판결에서도 현행 낙태죄 형사처벌 방식의 한계와 문제점을 명시하면서 여성의 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관해 불충분하게나마 언급하고 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임신이나 출산 여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삶에서 출현하는 다양한 맥락의 문제들이 고려될 여지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임신과 출산이 단순히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관계와 삶을 건강하고 평등하게 보장하기 위한 공동체의 책임과 연결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임신과 출산은 필수조건이고, 이에 공동체는 구 성원들의 임신과 출산을 위한 사회적 조건들을 마련해야 할 의무를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보장하는 일은 성관계에서부터 파트너십, 그리고 가족 구성과 임신 및 출산 또는 임신중단과 양육을 포괄하는 권리이자 이 모든 활동이 차별 없이 보장되기 위한 노동, 교육, 보건 의료, 환경 등을 포함하는 권리이기도 한 것이다[13].
국제 사회에서 재생산권의 논의는 1979년 12 월 UN 34차 총회에서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 이른바 여성차별철폐협약 (CEDAW)의 공식 채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1994년 카이로에서 열린 인구 및 개발에 관한 국제회의(ICPD)17)나 1995년 제4차 북경세계여 성대회18) 등에서 재생산 권리가 여성의 권리이자 보편적 인권으로 천명되면서 이 문제는 더는 사적인 차원이 아니라 국가가 개입하고 보장해야 할 영역으로 재인식되었다. 비로소 여성의 권리와 국가의 의무를 사회적 권리의 관점에서 논의할 여지가 마련되었다. 이제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를 재생산에 관련된 권리들로 접근함으로써 낙태 담론 패러다임의 중요한 전환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의 재생산권은 임신, 출산, 양육을 ‘할’ 권리와 ‘하지 않을’ 권리를 동시에 요구한다. 국가가 어떠한 이유로 임신중단을 금지하고 임신 유지와 출산을 강제하는 것, 안전한 낙태에의 미흡한 또는 불평등한 접근성, 장애를 이유로 강제적으로 불임 또는 낙태 수술 시행 등이 모두 재생 산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의료적 의사결정과정에 더 적합한 환자의 자율성 담 론은 충분한 의사결정능력을 보유하지 못한 사람 들, 즉 그들이 처한 현실적 상황으로 인해 자신들의 결정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나름의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고, 보다 적절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개발될 필요가 있다. 새롭게 재구성될 자율성 개념은 의사결정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적 변수들을 함께 포괄하여 논의하기 위해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적실성을 가져야 하며, 무엇보다도 임신한 여성이 고립된 원자적 존재가 아닌, 공동체 안에서 ‘평등한’ 동료 시민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시민과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 소 그 의미가 발휘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한편 개인이 결코 완전하게 독립적이지 않은 상호의존적인 상황에 있지만, 다른 한편 자신의 선택에 그 어떤 위력도 없는 상태에서 자기주도(self-direction)적 삶을 영위해야 함을 의미한다[14].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들 간에 분명히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에 대한 적절한 ‘조정’이 필요하다. 이때 페팃은 현실 속에서 완전히 실현될 수는 없지만, 현실을 평가하거나 개선하는 이상(ideal)으로서 이른바 ‘비지배 자유(liberty as non-domination)’를 제시한다[15].19)
페팃은 자유를 지배가 없는 상태, 즉 비지배 상태로 이해한다. 지배는 타인의 자의적 의지(arbitrary will)에 좌우되는 것을 말하는데, 자유는 이러한 자의적 의지에의 종속으로부터 해방될 때 실 현된다[15]. 기존에 외부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자신에 관한 일을 숙고하고 결정하는 독립된 주체의 ‘불간섭(non-interference)’으로서의 자유는 “타인들에 의해서 방해받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영역”으로 이해된다[16].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강제 나 위협 없이 행위 할 수 있다면 그 행위자는 자유롭다. 모든 선택은 개인의 의사가 우선이다. 개인 이야말로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선인지를 잘 아는 주체로서 이러한 선택 능력에 의해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 목적을 형성해 나갈 수 있다고 판단한다. 반면에 비지배 자유는 타인의 선호나 선의가 아닌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독립해서 살아가는 개인의 사회적 지위(social status)와 관계한다. 즉 개인이 타인의 자의적 간섭에 취약하지 않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고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진다.20) 이때 자의적 간섭의 여부가 타인의 인자함이나 관 대함이라는 우연이나 요행에 의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타인이 자의적으로 간섭할 능력을 갖추지 않는 상태이다. 즉 타인에 의한 자의적 간섭의 부재가 아니라 타인의 자의적 간섭에 대한 무능력의 상태를 의미한다. 가령 인자한 주인을 만난 노예가 주인의 간섭을 받지 않더라도 주인에게 예속된 상태에 놓여 있는 한 노예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예에 대한 주인의 자비심은 언제든 바뀔 수 있으며 노예는 눈치를 보며 주인의 기분을 살펴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항상 스스로 검열해야 하는 한, 자유롭지 못하다. 노예의 자유로운 삶의 가능성은 현재의 주인에 의한 자의적 간섭뿐만 아니라 미래에까지 그에 의한 자의적인 간섭의 가능성이 차단되어야 한다. 요컨대 노예의 자유는 단순히 현재에 주인의 간섭 행위의 부재가 아니라 주인의 간섭 행위에 대한 무능력과 연결된다. 주인으로부터 간섭받을지도 모른다는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그는 자유롭다. 비지배 자유는 타인의 자의적 간섭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간섭이 일어날 수 있는 앞으로의 가능성마저도 차단될 때 비로소 실현 가능하다[17]. 비지배 자유는 이러한 자의적 간섭의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제도적 장치를 수반한다. 자의적 지배에 대한 저항과 비지배 자유의 수호를 위한 “적절한 법체제”가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법에 따른 지배야말로 타인의 자의적 간섭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고, 더욱이 공동의 참여로 제정된 법은 자의성이 발생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의 자의적 간섭이나 지배를 제어하는 법적 개입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유는 오히려 확장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자의적 또는 비합법적 간섭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페팃의 비지배 자유는 개인 스스로 삶을 계획하고 꾸려나감에 있어 누구도 타인의의 지나 간섭에 예속되지 않고, 안전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적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비지배 자유는 소극적 의미의 자유의 보장으로부터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도 상호간의 동일한 조건에서 균형점을 찾을 수 있는 사회적 권리의 제도적 보장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비지배 자유는 개인이나 집단을 종속의 상태로 밀어 넣는 사회경제적 구조의 개선을 요구하고 동일한 이유에서 경제적 재분배를 통한 사회적 권리의 실 질적 보장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동안 낙태를 둘러싼 문제들에서, 특히 낙태죄에 관한 논쟁이란 마치 여성과 태아가 대립하는 구도에서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충돌하는 독립적인 하나의 사건으로 다뤄져 왔다. 2012년의 헌법재판소의 결정처럼 ‘공익과 사익’으로 대립되는 문제로 치환되거나 여성의 자기결정 권을 인정한다는 것이 곧장 ‘생명 경시 풍조’의 논 리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나 임신유지나 중단의 결정이 그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적 조건들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결국 국가나 사회가 그 구성원들이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어떤 삶의 조건들을 보장해야 하며, 또한 구성원들은 어떤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가에 대한 논의로 확장하게 된다. 여성이 재생산에 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은 사회구조적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는 개인의 선택과 접근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한 여성이 아이를 낳아 양육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이 지속가능하고 미래를 계획해 나갈 수 있기 위해서는 이를 실 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들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낙태죄 폐지는 단지 임신중단의 비범죄화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 성의 자기결정권에 의해 임신유지나 중단을 선택한다는 것은 임신중단을 권리의 문제로 규정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임신중단을 단지 허가 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로서 보장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아이를 언제, 몇 명이나 낳을지를 결정할 권리, 혹은 임부가 낙태 갈등의 상황에서 임신 유지나 출산 여부에 관해 필요한 사회적 논의 또는 소통을 할 수 있고,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의 선택에 정신적 지지와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즉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와 관련해서 자신이 처한 사회적·경제적 상황과 국가의 지원정책에 관한 상담과 교육도 이루어져야 한다. 충분한 숙고 후, 임신중단을 결정한 경우 적절한 시기에 안전한 방식으로 임신종결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수술과정에서의 의료 사고나 후유증 등이 발생하면 법적 구제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수술 전후로 적절한 의료서비스나 돌봄 등의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여성이 임신과 출산 그리고 양육과 관련해서 스스로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결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을 때라야, 즉 여성의 비지배 자유가 실현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여성의 재생산 건강권이 보장된다고 할 수 있다.
IV. 결론
낙태는 개인의 문제이자 사회적 문제로서, 임신 중단 여부만이 아니라 임신의 지속과 출산 그리고 양육 등과 함께 종합적인 시각에서 조망되어야 한다. 낙태를 둘러싼 기존의 “생명권이냐 선택권이냐”식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로는 우리 사회의 낙태 현실과 여성들이 실제로 겪는 낙태 경험의 다양한 층위의 물음들을 충분히 끌어낼 수가 없다. 더욱 이 태아의 생명권 논의에는 생명의 서열화와 정상성 개념이 내재되어 있으며, 생명과 생명권 개념의 혼동으로 ‘예외적 살인이 허용된 생명권’이라는 모순에 직면하는 등 낙태 관련 담론에서 새로운 난제들을 도출해 낸다. 이처럼 논리적, 개념적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까지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해 야만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익과 사회윤리적 차원에서 태아의 생명 보호의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될 수 있으며, 법적 근거 역시 마련되어 있다[18].21)
사실 태아의 생명 보호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서로 대립과 충돌의 관계라기보다는 보완과 의존의 관계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임신한 여성의 안위가 곧 태아의 안위이며,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임부의 협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태아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것은 임신한 여성에 대한 신체적 보호나 사회적 보호가 선결될 때 비로소 실질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제 낙태의 문제는 자신의 몸을 둘러싼 자율적 결정의 권리이자 일련의 과정에서 사회적, 국가적 책임까지 포괄하는 사회적 권리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이때, ‘비지배 자유’의 이상은 낙태의 담론에서 함의하는 바가 적지 않다. 기존의 자율성의 원칙이 의사결정능력에 주목한 데 비해 비지배 자유는 합리적이고 충분한 의사결정의 능력을 갖춘, 독립적이면서도 고립된 개인이 누리는 자유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저마다 처한 상황적 특수성이나 비대칭적 힘을 지닌 쌍방이 공정한 논의를 하도록 유도하고 논의의 결과가 상호간의 관계를 일방의 지배 또는 종속되지 않게 규제하는 자유에 주목한다. 더 중요하게는 비지배 자유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개선을 끌어내도록 국가가 지닌 시민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다. 이는 임신한 여성이 처한 다양한 현실적 어려움을 자기결정권 개념 안에 함께 구성하도록 요청하고, 나아가 여성의 인권이자 포괄적인 인간의 권리인 ‘재생산권’의 담론으로 확장하여 나갈 수 있는 윤리적 토대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