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이홍열 저[실제 말기암 환자의 진료 과정을 통해 살펴본 한국의 사전돌봄계획 현황](이하 논문)에서는 4기 편도암 환자가 10여 년에 걸쳐 점차 악화하여 임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실제 의료현장에서 사전돌봄계획과 연명의료결정에 관하여 드러날 수 있는 논점을 제시한다. 이 논문은 환자의 임상적 경과와 관련 논의 과정을 객관적이고 기술적인 형식으로 서술하여, 사전돌봄계획 수립과 연명의료 결정 과정에서 드러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조명하고, 이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환자의 가치 판단이나 선호, 의료진의 의사결정 배경, 논의의 구체적 맥락 등 전반적인 치료 및 돌봄 과정에서 환자의 자율성과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요소들이 충분히 서술되지 않아, 사례의 주요 의료윤리적 쟁점이나 논의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다.
이에 본 논평은 의료윤리적 관점에서 환자의 예후가 악화된 각 시점에 주목하여 돌봄 목표와 치료 방향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경위와, 사전돌봄계획이 미비한 상황에서 환자의 연명의료에 대한 결정이 어떠한 과정으로 진행되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연명의료 결정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현실적 어려움을 논의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의료현장에서 환자와 의료진, 그리고 대리인(가족‧사회복지사 등)이 직면하는 한계를 점검하고, 조기에 사전돌봄계획을 마련하기 위해 보완해야 할 요소를 모색함으로써, 생애말기 돌봄의 질을 향상시키고 환자의 존엄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을 제언하고자 한다.
Ⅱ. 4기 편도암의 진단과 치료(2012–2015): 사전돌봄계획과 대리의사 결정 기준
4기 편도암 진단 후 4년에 이르는 편도암 치료기간 동안 환자의 삶의 질은 급격하게 악화되었으며[1], 의학적으로 회복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되었다. 그러나 향후 임상 경과를 단정하기 어려워 의료진과 환자는 ‘현재 가능한 치료’에 집중했으며, 그 과정에서 연명의료, 호스피스를 포함한 돌봄 계획 및 목표를 사전에 설정하기 위한 논의는 진행되지 못했다.
환자가 의사를 명확히 표현할 수 있을 때 미리 치료와 돌봄 방향을 정하는 총체적 과정인 사전돌봄계획(advance care planning, ACP)은 연명의료 결정뿐만 아니라 완화의료 및 삶의 질을 고려한 돌봄 전략까지 폭넓게 포함한다. 그러나 본 사례에서는 예후가 불량하고 상태가 지속적으로 악화됨에도 사전돌봄계획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환자의 최선의 이익과 자율성 보장이라는 연명의료결정법의 제정 의의를 고려하면, 연명의료 논의를 조기에 진행하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관련 선행 연구에서, 연명의료 결정의 주체가 환자인 경우에서 가족인 경우보다 호스피스 이용 비율이 현저히 높다고 보고된 바 있다[2].
본 사례에서는 배우자가 호스피스 이용 여부를 결정했는데, 호스피스 이용률 차이에 대한 연구 내용이 시사하듯, 의사결정 주체에 따라 의사결정 경향이 크게 달라질 수 있으므로, 만약 환자가 의사결정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면 다른 선택이 이루어졌을 수 있다. 따라서, 환자의 최선의 이익과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환자주도적인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를 위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같은 형태로 환자가 분명한 자기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상태에서 논의해야 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환자주도형 의사결정 사례가 드물고, 가족이 대리의사결정의 주체가 되는 것이 당연시되는 경향이 있다[3]. 그러나 환자 중심의 의사결정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기 논의 확보와 더불어 환자의 의사를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방법으로 대리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때, 보호자‧사회복지사‧의료진 등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이들은 각각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이해하고 적절히 수행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들이 언제, 어떻게 개입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 정립이 중요하다. 의료진은 환자 상태를 전문적으로 판단할 수 있지만, 환자의 선호나 가치관을 온전히 파악하는 데는 시간적‧상황적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환자의 자율성을 충분히 보장하기 위해서는, 대리인이 환자의 가치관과 의사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또한, 대리 판단의 표준, 순수 자율성 표준, 환자의 최선 이익 표준이라는 세 가지 기준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논문에서 배우자가 대리인이 된 구체적인 경위가 드러나 있지 않으나, 비록 배우자가 대리인으로서 환자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려 노력했더라도, 환자가 상황에 따라 원하는 의료적 선택이 무엇일지 정확히 파악했는지는 불확실하다. 같은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내리는 합리적 판단을 이해하지 못하면, 환자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할 수 있으므로, 대리인을 포함한 비의료인도 의료윤리에 대한 기초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환자의 의사를 정확히 유추할 수 있도록 역량을 강화하고, 대리 판단 기준에 따라 의사결정이 가능한 대리인을 지정해야 한다. 사회복지사는 이러한 교육을 수행하고 법적 절차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아 대리인으로 고려될 수 있으나, 이를 위해서는 환자와 가족이 사회복지사의 기능과 책임을 명확히 이해해야 하며, 가족 외 대리인이 환자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도록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는 노력이 함께 요구된다[4].
Ⅲ. 진행성 편도암과 말기 상태로의 진행(2016–2020): 의료 참여와 책임의 범위
환자가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일상활동에 도움이 필요했으며, 의학적으로 비가역적인 상태임이 명확하게 판단되었다. 이에 호흡기내과 전문의는 치료 불가능한 편도암의 진행으로 전신쇠약이 심화되고 폐렴과 같은 합병증이 발생하였다고 판단하여 연명의료 상담의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첫 번째 연명의료 상담이 진행되었다.
호흡기내과 전문의는 편도암을 담당하는 종양외과 전문의와의 상담을 권유했으나, 환자와 가족에게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거나 전문의 간 협력을 통해 체계적 논의를 진행할 여건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신경외과 전문의 또한 뇌질환 상태에 집중하면서, 환자의 전반적 상태와 예후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이는 일반 치료에서 완화의료로의 전환 과정에서 의료진의 책임 범위가 명확히 설정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종양외과 전문의는 환자가 아직 말기 상태가 아니라는 근거로 연명의료 결정 논의를 유보하였다. 이는 사전돌봄계획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부족이나 법적 책임에 대한 부담[5], 의료진을 대상으로 한 교육의 부족, 또는 현행 제도의 영향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실제로 현행 연명의료계획서 서식은 ‘임종 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을 기준 시점으로 제시하고 있어, 이에 말기 진단 여부와 관계없이 연명의료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하는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이 제안되고 있다[4].
논문 내 연명의료 결정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구체적 원인이 충분히 드러나 있지 않아, 의료진의 판단 배경을 이해하는 데 일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사전돌봄계획에 대한 의료진의 소극적 태도와 낮은 참여는 의료진 간 협력 부족[6], 역할에 대한 소극적인 판단, 사전돌봄계획에 대한 이해 부족, 그리고 법‧제도적 한계 등 다양한 요인의 복합적인 작용과 관련될 수 있으며,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은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다[7–10].
특히 의료기관 간 협력 체계가 미비하거나 다학제적 접근이 부족할 경우, 각 전문 의료진이 환자의 치료 목표와 돌봄 방향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어 통합적이고 효율적인 돌봄계획을 수립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한다. 또한, 의료진이 사전돌봄계획에 대한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할 경우, 그 필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환자와 보호자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한계를 가질 수 있다. 실제로 의사와 간호사의 사전돌봄계획에 대한 인식 또는 참여 경험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경향을 보이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 의료인 교육 과정에 사전돌봄계획의 개념과 실무를 포함하는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나아가, 사전돌봄계획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과 전담 인력 배치와 같은 제도적 지원 방안 마련도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11,12].
더불어, 의료진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인센티브 제공과 같은 보완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실효성 있는 제안으로 고려될 수 있다[13,14]. 이러한 노력이 병행될 때, 의료진의 인식이 제고되고, 환자의 상태 변화에 따른 돌봄 목표 및 치료 방향에 대한 논의가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환자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이 존중되는 의료 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Ⅳ. 말기 상태의 악화와 임종(2021–2023): 완화의료의 제도적 개선
환자가 음식물을 삼키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러 위루술이 시행되었으며, 이는 환자의 삶의 질이 크게 저하되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신체 기능도 크게 떨어져 원활한 의사소통이 어려워지고 일상생활 수행 역시 제한되었다. 이로 인해 의료에 대한 환자의 자율성을 온전히 행사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러 배우자가 대리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두 번째 연명의료 상담에서도 배우자는 적극적인 치료를 희망하였다. 이 시점에서 사전돌봄계획이 마련되지 않은 한계가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환자의 의식이 명료하고 의사소통이 원활했던 시점에 앞으로 예상되는 임상 경과와 연명의료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논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환자의 치료 선호보다는 배우자의 치료 의사가 더 강하게 반영되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환자의 자율성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했다는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며, 사전돌봄계획이 조기에 마련되었다면 환자가 자신의 이익과 선호에 따라 다른 결정을 내렸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또한, 환자와 배우자는 연명의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으나 호스피스 제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이 단계에서 처음 접했다. 정보 제공이 늦어지면서, 환자와 보호자는 호스피스를 포함한 생애말기 돌봄 옵션을 충분히 숙고할 기회를 갖지 못한 점이 주요한 한계로 남는다. 호스피스 제도는 통증, 통증 조절, 심리‧사회적 지원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할 수 있으나[15], 본 사례에서처럼 호스피스 이용을 비롯한 생애말기 돌봄에 대한 선택은 종종 치료 포기로 오인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의 극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의적절하고 체계적인 교육이 중요하다[16]. 본 사례에서 사망신고 절차에 대해서는 사전 교육내용에 따라 배우자가 적절히 대처하였다. 마찬가지로, 사전돌봄계획 또한 의료진뿐만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를 포함한 비의료인을 대상으로 한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교육 비디오와 같은 시청각 자료를 활용하면 비의료인이 사전돌봄계획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실제로 이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전돌봄계획에 대해 더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17]. 따라서, 사전돌봄계획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환자와 보호자의 이해도를 높이고, 호스피스 제도와 같은 생애말기 돌봄 서비스의 이용률을 제고하여 보다 적극적인 돌봄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환자가 기존 병원에서 연명의료, 완화의료, 호스피스를 포함한 포괄적 돌봄을 연속적으로 받을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도 있다. 본 사례처럼, 환자가 이용하던 대학병원이 호스피스전문기관으로 지정되지 않은 경우, 익숙한 병원을 떠나 새로운 기관으로 전원해야 한다는 부담이 가중된다. 이로 인해 호스피스 제도 이용이 ‘적극적 치료’의 포기로 오인될 가능성이 더욱 커질 수 있고, 단순히 치료적 측면을 넘어 좋은 죽음(a good death)의 주요 요소 중 하나로 고려할 수 있는 ‘익숙한 환경에서의 임종’(영국의 End of life care strategy[18])이라는 측면에서도 보호자의 심리적 안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즉, 호스피스가 보다 나은 돌봄 옵션으로 기능하고 환자와 보호자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기존 치료 환경과의 원활한 연계가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V. 결론
본 사례에서는 두 차례의 연명의료 상담이 있었음에도 사전돌봄계획이 수립되지 않아, 환자가 연명의료의향서나 계획서 없이 가정에서 임종을 맞았다.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의료진의 노력과 다학제적 검토, 그리고 환자의 자기결정을 존중하기 위한 적절한 시점의 논의 과정과 이를 위한 사전 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점이 두드러진다. 연명의료 결정과정에서 특정한 문제나 갈등이 발생한 것이 아님에도, 환자의 자율성 및 선호가치, 그리고 삶의 질을 고려하는 돌봄 방향 및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논의가 시의적절하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는 ‘환자의 존엄과 삶의 질 보장’이라는 의료의 궁극적 목적을 고려할 때, 생애말기 의료와 돌봄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되돌아보게 한다.
사전돌봄계획의 부재는 환자 중심의 치료와 돌봄을 어렵게 하고 의료 시스템 내에서 여러 한계를 노출한다. 환자의 자기결정권 약화, 의료 자원의 비효율적 사용, 불필요한 연명치료 지속을 통한 삶의 질 저하, 가족 간의 갈등 및 경제적 부담 가중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조기에 사전돌봄계획을 충분히 논의하면, 환자의 이익과 선호, 자율성을 충실히 반영한 치료 및 돌봄 방안을 함께 고려할 수 있으며, 연명의료 결정‧완화치료‧호스피스 돌봄이 따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체계로 이어질 때, 보다 일관된 환자 중심의 의료가 실현될 수 있다. 본 사례는, 향후 유사한 상황에서 환자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개인의 가치 판단에 따라 치료 및 돌봄 방향을 조기에 숙고하고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윤리적‧제도적 기반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연명의료결정제도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참여동기를 만들고 장애요소를 해소하는 일이 필요하므로[9]” 본 논평은 환자가 자신의 가치와 이익을 반영한 의료 선택을 하고 생애말기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의료윤리적‧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져야 함을 제언한다.